니콜로 파가니니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슈퍼스타였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그는 어디서나 열렬히 환영받았으며 프란츠 리스트나 프레데릭 쇼팽, 로베르트 슈만 같은 대가들도 그를 본받으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그가 곡을 쓰는 이유는 출판을 위해서가 직접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은 필사, 변주, 편곡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사생활이 신문에 보도되고 파가니니 스타일의 의상과 레시피가 등장했으며 그의 초상화가 시계나 접시, 휴대용 분갑을 장식했다. 파가니니는 모두 여섯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숨 막히는 효과가 두드러지는 이 작품들은 한계를 모르는 그의 기교적 재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782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니콜로 파가니니는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일찍부터 교육을 받았고 11세에 이미 신동으로 대중 앞에 섰다. 연주의 기술적 섬세함은 독학으로 연마했으나 1795년경 파르마에서 오페라 작곡가인 페르디난도 페어에게 작곡의 기초를 배우기도 했다. 1805~1908년에 파가니니는 유일하게 루카 공화국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자 실내악 비르투오소, 오페라 감독이라는 정규직을 가졌다. 이 무렵에 관현악과 기타 반주를 곁들인 바이올린을 위한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다. 그 후 그는 비르투오소로서 급속히 경력을 쌓아나가며 이탈리아 전역에서 연주했고 당대에 가장 중요한 필하모닉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1820년 그는 〈24개의 카프리스〉 op. 1을 발표했는데, 이는 19세기 초 기교의 정수를 보여줌과 동시에 바이올린 교육의 길잡이가 되는 작품이다. 1828년에는 빈에서 열광적인 음악회를 열었고 보헤미아와 독일 투어, 파리에서의 화려한 공연이 이어졌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150회가 넘는 음악회를 거친 후 파가니니는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사람들은 그의 외모에서 영감을 받아 경이로운 그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렀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그를 “지옥에서 올라온 사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파가니니는 후두 결핵을 비롯해 여러 가지 병을 앓았고 생애 말기에는 그로 인해 목소리까지 잃게 되었다. 그는 57세의 나이로 니스에서 사망했다. 처음에는 그에게 교회 장례가 거부되었었고 그의 유해는 수십 년간 떠돌다가 마침내 파르마에 안치될 수 있었다. 오늘날 파가니니의 특이한 운지법은 의학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 이론에 의하면 그가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마르판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는 손의 극단적 유연성을 초래하는 유전적 질환인데, DNA 분석으로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공연